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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액티브시니어] 연구는 내 운명, 정필수 원장 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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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8-07-03 | 작성자 | 관리자 |
은퇴 후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현역 시절보다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이가 들수록 실패의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정필수 원장이 한국종합물류연구원(glori) 설립을 결정하기까지도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당시 독립연구소가 국내에서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던 탓에 충분한 시설과 시스템을 갖추지 않고도 연구소를 운영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그러한 걱정을 안고 성남 창업보육센터 한 켠에서 출발했던 한국종합물류연구원은 지난 5월 성공적으로 설립 13주년을 맞이했다. 5차례의 이사를 거쳐 별도 건물에 자리잡은 어엿한 연구소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인생 후반의 녹록지 않았던 도전에 성공한 정필수 원장을 만나 그 비결을 들어봤다.
박사님의 은퇴준비
정필수 원장은 미국 텍사스대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산업연구원과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등에서 30년 넘게 연구 활동을 한 한국연구소 1세대다. 그는 57세가 되던 2003년 3월,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부원장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당초에는 정년까지 시간도 남아있었고, 원장까지 해볼 욕심에 퇴직은 생각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막상 후배가 원장이 되고 보니 연구원에 남아있기가 어려웠다. 젊은 후배들에게 길을 터줘야겠다는 생각에 퇴직을 했다.
연구원을 떠나게 된 정 원장에게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지막까지 연구에서 손을 놓지 않았던 그로서는 ‘조기에 은퇴한다’거나 ‘나이가 많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할 것인가 길을 찾고 있던 중 미국에서 외식사업을 하던 선배로부터 ‘사업을 확장하려는데 같이 일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연락이 왔다. 그는 또 다른 도전이라고 판단하고 선뜻 나섰다.
“처음 해보는 외식사업이지만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많은 후배 연구원을 이끌고 연구를 수행한 경험이 있는 만큼 사업관리도 비슷할 거라고 여겼죠. 그게 정말 큰 실수였어요. 연구원과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은 업무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맡은 일만 잘해서 성과를 내면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경력이 쌓일수록 연구 활동보다는 프로젝트 진행상황을 관리∙감독하게 되고, 퇴직 직전에는 결재만 담당할 수도 있고요. 관리자로서 큰 그림은 살필 수 있지만 과정 전반을 직접 수행하긴 힘들어지죠. 그래서 정작 홀로 설 때가 되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들도 많아요. 저도 그랬고요.”
그러나 막상 외식사업 일선에서 일한 경험은 “돈 버는 일이 이렇게 힘들구나”라는 생각을 뼛속까지 스며들게 했다. 그 동안의 연구 활동은 외식사업 부사장 직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익이 나지 않는 날마다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철저한 서비스정신으로 스스로를 낮추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배겨낼 수 없었다.
“최근 뉴스를 보면 중∙장년층이 너도 나도 퇴직 후 치킨집 창업에 나선다고 하죠? 철저한 사전조사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면 쉽게 도전해서는 안 돼요. 창업하려는 아이템이 어떤 과정을 거쳐 수익을 창출하는 지 제대로 이해해야 해요. 매번 부하 직원을 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허드레 일도 직접 할 수 있어야 하고요. 비단 연구원뿐만이 아니라 퇴직 후 사업에 처음으로 도전하려는 분들이라면 반드시 이러한 각오를 다지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정 원장은 결국 18개월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의 짧은 외도 뒤에 얻은 깨달음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생 연구밖에 하지 않았고, 연구만큼 좋아하는 일이 없으니 후반 인생도 그렇게 살겠다고 결심했다.
“옷도 자기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으면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연구가 제게는 딱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독립연구소를 세우게 된 계기죠. 현역 당시 필요하다고 느꼈던 부분이기도 해요. 제조업이나 일반적인 산업 시장은 삼성, LG와 같이 10대 대기업이 있다면, 500개의 중견기업이 있고, 그들을 돕는 5만 개의 소기업, 50만 개의 더 작은 기업이 있어서 단계적으로 보완이 돼요. 아쉽게도 연구 분야는 이런 구조로 되어있지 않았죠. 정부에서 출연한 큰 규모의 연구소가 있고, 목적에 따라 기업이나 대학에서 운영하는 연구소가 있을 뿐이죠. 각자 역할을 훌륭히 소화하긴 하지만 큰 연구소에서 미처 수행하지 못하는 영역도 많거든요. 국내에서 연구 산업이 생소한 분야였기 때문이었을 거에요. 점점 연구 시장이 커지면서 작은 연구소들이 더 필요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틈새시장을 겨냥해서 작지만, 필요한 연구소를 만들자는 생각을 한 거죠.”
물론 연구원 설립 이전에는 고민도 많이 했다. 가장 큰 고민은 늦은 나이에 시작한 일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와 가족이 겪어야 할 위험이었다. 그때 힘을 보탠 게 미국 워싱턴대 교환교수 시절 인연을 맺었던 미국인 교수였다. 귀국을 앞둔 정 원장은 시애틀에 있는 그 교수를 방문해 향후 계획에 대해 상의를 했다. 정 원장의 계획을 들은 그는 “당신 같은 인재가 한국에 가서 한국을 위한 일을 하는 게 맞다”고 조언했다. 그는 잘못 됐을 경우를 걱정하는 정 원장에게 “정박사 성격상 반드시 성공한다”고 응원하며, 그래도 어려우면 자기가 3년 먹고 살 프로젝트를 주겠다고 힘을 보탰다. 그 응원에 힘입어 2005년에 설립한 것이 지금의 한국종합물류원(GLORI)이다.
…[액티브시니어] 연구는 내 운명, 정필수 원장 ②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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